[여창용의 연예이바구] 연예기자가 기사를 자랑스럽게 쓰는 날은 언제?

2019-11-25 14:02 입력

[여창용 기자 hbehong@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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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인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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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피의 사색 # 324 / '끊을 절(絶)'
[아시아빅뉴스 김동효 문화칼럼리스트] [사진제공 = DJ래피] '술을 끊었다, 담배를 끊었다' 등에 쓰이는 한자, 絶(끊을 절). 絶의 갑골문을 보면 絲(실 사) 사이에 여러 개의 칼이 그려져 있다. 무언가를 끊을 땐 뜨뜻미지근하게 말고 단칼에 자르듯 끊어야 한다. 끊는 건 공자가 단연 선두 주자다. 공자가 끊어버린 네 가지, 자절사(子絶四)란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를 말한다. 1. 의 : 주위를 돌보지 않는 사사로운 마음. 2. 필 :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이루겠다는 집착 3. 고 : 변화를 거부하는 꼰대 마인드 4. 아 : 자기만 맞고 나머지는 다 틀렸다며 굽히지 않음 1. 세상 혼자 살 수 없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 2. '반드시'를 버리면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된다. 세상 일은 '반드시'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 3. 易, 변화는 천지자연의 원리다. 변화를 거부함은 자연의 섭리를 거부함이다. 4. 사실이 아니라 의견이고, 진실이 아니라 관점이다. 어찌 내 말만 맞을 수가 있나?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겸손'이다. 겸손의 겸(謙)은 [言+兼], 즉 '말을 포용한다'라는 뜻이다. 내 말만 옳다고 할 게 아니라 남의 말도 들을 줄 알아야지. 당장 어떤 사람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라. 왠지 모르게 겸손과 사랑이 넘치는 얼굴이 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의 얼굴에선 오만과 고집불통의 이미지가 꽉 차 있다. 관상은 이미지다. 그건 성형수술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겸손의 삶, 관용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생기는 나이테가 바로 좋은 관상이다. 눈앞에 미운 사람이 없고 마음에 불평할 일이 없는 것이 평생의 지극한 즐거움이다. (眼前無不好人, 肚裏無不平事, 是爲平生至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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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피의 사색 # 323 / '완벽한 선택'
[아시아빅뉴스 김동효 문화칼럼리스트] [사진제공 = DJ래피] 최근 내 주변 여러 명이 세상 일과 사람에 대한 푸념을 한다. 오늘 BGM은 신촌 블루스 노래 '아쉬움'이다. 삶은 하나를 선택하는 동시에 다른 기회를 포기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완벽한 결과는 없으며 무엇을 하든 아쉬움이 남는다. 그게 삶이다. 그러니, 기죽지 말자. 완벽한 선택이 없으므로 완벽한 만족도 불가능하다. 만족은 언제나 부분으로만 충족되므로, 뭔가를 선택했다면 끝까지 집중하고 그 책임도 오롯이 져야 한다. 삶은 완성이 없다. 오직 내가 한 선택을 옳게 만들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 기죽지 말자. 하루에도 수십 가지 선택을 한다. 뭘 먹을지, 무슨 말을 할지, 크게는 더 많은 대가를 부르는 선택도 있다. 실패라고 생각했던 선택이 때론 더 큰 성공이 되기도, 성공이라 자만했던 선택이 뜻밖에 아픔으로 돌아올 때도 있다. 완벽한 삶을 사는 것같은 사람들도 실제로는 숱하게 실패한 선택들이 공존한다. 그러니, 기죽지 말자. 실패를 통해 자신을 더 알게 되고 단점을 알아가면 된다. 실패가 두려워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주저앉지만 말자. 다들 "과거로 돌아가면 이런 선택은 안 했을 텐데... A 대신 B를 택했으면 훨씬 행복했을 텐데..." 하고 후회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때로 돌아가도 또 A를 택할 것이다. 왜냐면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그러니, 기죽지 말자. 비가 오고 안 오고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하지만 비를 맞고 안 맞고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현실엔 완벽한 기쁨이 없다. 선택을 아무리 신중하게 한다고 해도, 우리는 부분으로만 기쁘고 행복하다. 완벽한 선택을 기대하지 말고, 일단 선택했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자. 그러니, 기죽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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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피의 사색 # 322 / '사' 자와 사짜
[아시아빅뉴스 김동효 문화칼럼리스트] [사진제공 = DJ래피] 다음 중 변호사와 같은 뜻을 가진 '사'는? 1. 의사 2. 검사 3. 박사 정답은 박사다. 다 같은 '사' 아니냐고? 아니다. 판사, 검사, 도지사 등은 事를 쓰는데, 일을 맡은(또는 우리가 일을 맡긴) 사람이라는 뜻이다. 판사는 판결 업무를, 검사는 검찰 업무를 똑바로 해내라고 맡긴 사람이다. 한자 事는 일만 뜻하는 게 아니라, '시키다, 부리다'의 뜻도 갖고 있다. 하지만 간혹 국민이 시킨 대로 일을 똑바로 안 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린 그런 사람을 사(事) 자가 아닌 사짜라 부른다. 의사, 약사, 간호사, 교사, 목사, 사육사, 요리사 등은 師를 쓰는데, 이들은 직접 몸을 써야 하는 속성이 있으며 남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도 하는 사람들이다. 의사는 환자를 잘 가르쳐야 되고, 교사는 학생들을 잘 가르쳐야 되고, 목사는 교인들을 잘 가르쳐야 된다. 하지만 간혹 똑바로 안 가르치거나 그릇된 걸 가르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린 그런 사람을 사(師) 자가 아닌 사짜라 부른다. 변호사, 변리사, 세무사, 회계사, 관세사, 박사, 속기사 등은 士를 쓰는데, 이들은 모두 공인기관 또는 국가에서 일정한 조건과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만 부여하는 자격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간혹 자격이 안 되어 보이는 사람도 있는데, 우린 그런 사람을 사(士) 자가 아닌 사짜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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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피의 사색 # 321 / ‘완벽’
[아시아빅뉴스 김동효 문화칼럼리스트] [사진제공 = DJ래피] 당신은 절대 완벽한 정삼각형을 그릴 수 없다. 나는 거기에 자신 있게 베팅할 수 있다. ''묻고 더블로 가!'' 정삼각형을 한번 그려보라. 비슷하게는 그릴 수 있지만 완벽하게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 변의 길이가 똑같아야 하는데 아무리 정교하게 그려도 오차가 생긴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려온 정삼각형은 사실 정삼각형이 아니다. 우린 오직 마음속으로만 완벽한 정삼각형 또는 원형을 그려볼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어떤 물체도 완벽하게 둥글 수는 없다. 다만 좀 더 또는 좀 덜 둥근 원들만이 존재한다. 사람인들 어떻겠는가? 사람은 완벽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떤 선택도 완벽할 수 없다. 삶은 하나의 기회를 선택하는 동시에 다른 기회를 포기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다만 최선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이게 바로 삶의 기본값이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는 완벽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완벽이란 불가능한 환상인데도, 그걸 달성하지 못하는 좌절감이 우리를 짓누른다. 해결책은 하나다. 인생에는 완벽함이 없다는 걸 기본값으로 다시 설정하는 것. 중요한 건 자신이 살아갈 인생을 선택했다면 열심히 그 인생을 가꾸어야 한다는 거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면 늘 완벽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사실 숱하게 실패한 선택들과 방향 전환이 공존한다. 실패를 통해 자신을 더 알게 되고 보완했을 따름이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오히려 완벽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뜻밖의 상황이 찾아와 언제라도 문을 두드리게 한다. 인생은 그저 '뜻밖에'의 연속일 따름이므로.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향해 가느냐 하는 것이지, 어디에 도착하느냐가 아니다. 인간은 죽음 이외의 그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사막의 도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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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피의 사색 # 320 / ‘싸움을 거는 가장 빠른 방법’
[아시아빅뉴스 김동효 문화칼럼리스트] [사진제공 = DJ래피] “시끄러워! 내 말 들어! (삿대질 추가)” “됐고! 내가 말이야...!” 소통 단절과 싸움을 유발하는 신호들.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시각을 원천봉쇄하는 말들. 하여 반면교사와 타산지석으로 삼아 되새기고 되새겨야 할 주문은 이거다. “듣자, 듣자, 듣자.” 어떤 자극이 오더라도 욱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현명한 대처를 하려면 몇 초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이성과 감성이 조율되는 겸손과 인내의 시간 몇 초, 이게 듣기의 기본 조건이다. 공자의 스텝을 밟아보면 불혹, 지천명 다음이 바로 ‘이순(耳順)’인데, 귀가 순해진다는 뜻이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나이 60이 되면 자동으로 귀가 순해진다는 게 아니라, 나이 60이 되어도 듣지 않고 버럭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경청이 이렇게나 어렵다. 경청은 한자로 ‘傾聽’이다. ‘청(聽)’은 귀 이(耳), 눈 목(目), 마음 심(心)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함께 해야 비로소 경청이 된다. 마음을 여는 게 핵심이다. “태산불양토양(泰山不讓土壤),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다. 내가 듣기 싫은 말이 들려온다고 버럭 하는 것은 경청의 자세가 아니다. 사람에게 다가서는 길은 혀를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귀를 내미는 것이다. 인간은 무슨 동물? 습관의 동물, 망각의 동물. 경청도 하나의 습관이며 훈련에 의해서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말을 너무 많이 한다’ 또는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다’ 등의 비난은 있지만 ‘너무 많이 듣는다’라는 비난은 들어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