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경순일 작가, 선인들도 못해낸 것을 규범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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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일 작가, 선인들도 못해낸 것을 규범으로 만들었다

기사입력 2012.02.24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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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덩샤오핑(鄧小平)이 살았던 옛집과 허우하이(後海) 르창음식점(日昌餐廳)의 서쪽에서 첫 번째 골목에 접어 들어 남쪽으로 300 미터 걸으면 작은 사합원(四合院)이 하나 있는데 바로 ‘징순이서예관(景舜逸書藝館)’이란 곳이다. 사합원 외벽에는 징순이와 제자들을 소개하는 내용이 붙어 있다. 정원 안에는 응접실, 작업실, 수업실이 있고 실내 집물들와 배치 또한 모두 서예과 연관되어 있다. 정원에 들어가는 순간 학자의 냄새가 한번에 느껴지고 공기 중에는 어느새 필묵의 담담한 향이 퍼져 있다. 사합원은 예술관의 기능 외에도 청소년들의 서예교육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간간히 외국인들이 들려 참관하기도 한다. 얼마전 기자는 응접실에서 평상복을 입고 <서예예절학>을 열심히 검토하시는 징순이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서법이란 말을 꺼내자 진수이 선생님은 각별히 흥분하셨는데 <서법예절학> 부터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법예절학>은 40여년간 축적한 서예공부와 연구 창작 및 서예교육의 경험을 5년이란 시간을 들여 완성한 것인데 이제 곧 출판된다고 말했다. 서법예절은 서예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서법과 예의를 갈라 놓을수 없다. 서로를 융합시킨 서예작품을 보면 글자와 필획 하나하나에 예의가 담겨 있다. 글은 쓰는 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필, 묵, 지, 연 및 교재(비첩)를 공경해야 한다. 글을 쓸 때는 아무렇지 않게 성격 나름대로 써서는 안된다. 아주 작은 점이라도 정성껏 새겨야 한다.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다음 필을 들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이는 바로 글을 쓰는 준칙이자 사람이 되는 도이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서예에는 문명이 담겨져 있으며 예의를 드러내보인다. 글자 하나에도 필법, 구조, 구도의 예가 있다. <조전비(曹全碑)> 글자를 예로 필법의 예의를 살펴보면 점이 굵은 부분이 수석이고 가는 부분이 차석이다. 가로(橫,횡)의 경우, 앙(仰,우르럴 앙)과 부(俯,구부릴 부)의 중간부분이 수석이고 곧게 뻗은 부분이 차석이다. 파횡(波橫)이라면 꼬리부분이 수석이고 시작부분이 차석이다. 세로(豎,수)를 그을 때는 굵은 부분이 수석이고 가는 쪽이 차석이다. 삐침(撇)과 벌림(捺)도 굵은 부분이 수석이고 가는 부분이 차석이다. 꺽는(折) 방향이나 꺽히는 부분이 수석이고 시작과 꼬리 부분이 차석이다. 구조의 예의에서 필획은 늘 글자 하나하나의 주간(主筆)이다. '谷'자의 파횡, '米'자의 세로, '少'자의 삐침, '元'자의 벌림, '司'자의 꺽임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좌우(左右) 구조로 된 글자를 볼 때 '敏'자는 좌측, '煌'자는 우측에 치우친다. 좌중우(左中右) 구조로 된 글자를 예로 들면 ‘織’자는 중간을 정면으로 고정하고 수석으로 했고 좌우 양측을 움직여 차석으로 했다. 일반적으로 구도의 예의는 본문(正文) 내용을 수석으로 하고 관제(款題)와 검인(钤印) 부분을 차석으로 한다. 그러나 정문 중에도 주요한 글자가 있다. 이를테면 첫 번째 행에서 첫 번재 글자가 수석이고 행 간격을 볼 때 첫 번째 행이 여러 행의 주행(主行)이다. 이밖에 예서(隸), 해서(楷), 행서(行), 초서(草)를 보면 모두 둥근 원필이다. 원필(圓筆)은 하늘을 뜻하고 방필(方筆)은 땅을 뜻한다. 호형필(弧型筆)은 힘을 뜻하고 곡형필(曲型筆)은 생명을 뜻하며 비백필(飛白筆)은 햇빛을 뜻한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자는 매 한 폭의 작품마다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되 처음부터 마감까지 성의껏 쓰는 것이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서법예의는 서법의 문화로 필획구조(結字), 운필(用筆), 구도(章法)를 통해 서법의 규률, 서법의 변증법과 예술미학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필획구조에는 회피와 다툼(爭讓), 주요와 차요(賓主), 성김과 빽빽함(疏密), 너비와 지름(寬窄), 높낮이(高低)가 있고 운필에는 가로와 세로 및 펼침과 가다듬음(縱橫收放), 성김과 빽빽함, 올림과 억누름 및 날렵함과 둔중함(提按疾澀), 굵음과 가늠(粗細), 부드러움과 강함(剛柔), 라인의 구불구불함과 곧음이 있으며 묵을 사용할 때에는 메마름, 윤택함, 짙음, 연함이 있다. 또 구도에는 위로 올려드는 것과 아래로 억누르는 것 및 좌고우면(左顾右盼)이 있고 리듬에는 기복의 불안정(跌宕), 완급지속(舒缓快慢)이 있다. 이는 모두 서법의 모순과 대립의 통일성 규칙이다. 청소년들은 서예공부를 함에 있어서 기법만 배울 것이 아니라 서법의 참뜻, 서법의 예의, 사람의 도리와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고 인간관계를 잘 처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또 서예 선생님이 가르치면서 교도하는 것은 속된 습관을 시정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글자를 쓰는 법이 없으면 글자가 산만해지고 무질서해 보이는 것처럼 사람도 무례해 보인다. 그럼 글자의 점, 길고 짜름, 굵음과 가늠, 내려봄과 올려듬, 향배(向背)를 어떻게 판별하고 배치할 것이냐. 여기서 만약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제대로 판별할 수 없다. 그러면 습자 할 때에는 반드시 일체일첩(一體一帖)을 기준으로 한다. 여기서 하나를 준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글자의 점, 구조, 구도의 예의도 없게 된다. 징순이 선생님의 서도(書道)에 대한 서술을 보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탁 트이게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서법예절학>은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서법의 예의라는 각도에서 한자 서체를 해석한 책이라고 전했다. 서법과 예의를 병행하여 교육할 것을 제출하고 또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은 전례없던 창의적인 행동이었다. 이에 베이징대학 교수 겸 중국문화원 원장이신 왕서우창(王守常)은 ‘선인들이 못해낸 것을 법규로 만들었다’고 격려의 한 마디를 적었다. 기자가 최근에 청소년들의 서예교육에 대해 물었을 때 징순이는 이렇게대답했다. 당대 국학대사이며 서예가의 으뜸으로 불리우는 치궁은 청소년들의 서예공부에 대해 줄곧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으며 ‘어린이들이 쓴 글이라면 한장 한장씩 다 보고 한 글자 한 글자씩 다 읽는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한번은 어린 학생을 데리고 방문했는데 그 분은 ‘지금 다들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이런 때일수록 청소년들에게 서예를 전수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중화문화를 교육하는 것이며 참 잘했다’고 하시면서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 자주 격려해 줌으로써 될수록 그들의 장점을 찾아 칭찬해야 한다. 수강내용은 간단명료하고 알아 듣기 쉬워야 하고 숙제를 검사할 때에도 너무 많이 지적하지 말고 중점만 지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가 이러한 가르침을 직접 실천에 옮긴 결과 매우 큰 효과를 거두었으며 청소년들의 서예공부를 격려하기 위해 가끔씩 사비로 간단한 상품 같은 것을 사기도 한다.   현재 고대문 일인자로 손꼽히는 징순이   징순이(景舜逸)의 본적은 허베이성 런츄(任丘)이며 1959년에 베이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서화를 좋아했고 유명한 서화가 나치섄(那啓賢)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나중에 치궁(啟功) 선생님을 따라 다년간 전서(篆), 예서(隸), 행서(行), 해서(楷), 초서(草)를 섭렵하였으며 특히 석고문, 종정문과 갑골문에 능하였다. 다년간 부지런히 허심하게 배우고 많은 서적을 읽은 결과 손이 마음에 비해 더 빨랐고 비문을 보물로 간주했으며 고대인들이 일컬은 명승고적이라면 모르는게 없었다. 중국 고대서예의 우량한 전통 및 중국 고대 미학 스타일과 표현방식을 알아내기 위해 베이징대학 도서관, 베이징 도서관, 수도도서관을 전부 다 뒤졌다. 1987년,28살 나이에 징순이는 서화전을 개최하였다. 지도교사 나치섄 선생님은 치궁의 제자임을 알고 치궁 선생님께 전시회 명칭을 부탁했는데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과연 징순이한테 연락이 왔다. 그날 오후 2시 치궁의 서재에는 4팀의 손님들이 있었다. 그 다음날에는 또 싱가폴 방문일정이 잡혀 있었다. 손님들이 다 가니 저녘 6시였다. 만나자 치궁 선생님은 회지에 전시회 명칭을 쓰시고는 용띠해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쌍용도안이 있는 날인을 찍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나치섄 선생님께 어떻게 답례해야 할지를 묻자 ‘괜찮아. 줘도 받지 않을거야. 곱절로 노력하면 된다’고 하셨다. 1990년 31세에 수천자에 달하는 장편논문 - <석고문 연구>를 발표하였다. 석고문은 선진(先秦)시기 10개의 고대시로 북처럼 둥글게 생긴 돌에 당시 유렵하는 모습을 석각한 문자로 중국의 서예 발전사상 상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서예가치가 극히 높다. 청나라 캉유웨이(康有爲)는 ‘석고는 중국의 제1문물로 서가로서 지켜야 할 제일법칙이다'라고 했으며 고금학자들도 석고문이라면 최고의 예의를 갖춘다. 옛날에는 위스난(虞世南), 주쑤이량(褚遂良), 어우양쉰(歐陽詢), 장화이관(張懷瓘), 한위(韓愈), 쑤스(蘇軾)가 문장에 옮겨 노래했고 오늘날에 와서는 뤄진위(羅振玉), 마헝(馬衡), 마수룬(馬舒倫), 궈머뤄(郭沫若), 탕란(唐蘭), 치궁(啟功)이 이를 고증하고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년대, 칭호, 모사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엇갈린 의견이 많다. 징순이가 집필한 <석고문 연구>의 학술성과를 4개 방면으로 종합할 수있다. 1. 당나라와 송나라 때부터 고고학적 각도에서 고증한 결과에 따르면 석고문은 진나라 때의 산물이다. 징순이는 서체의 발전흐름에 따라 전후 서체와의 인과관계를 찾음으로써 석고문의 연대를 입증하는 진헌공설(秦獻公之說)을 제출하였다. 2. 선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석고문의 서체 구조 4대규율을 총화했다. 즉 대칭되는 가운데 변화를 주었고, 글자의 왼쪽을 길게 오른쪽을 짧게 새겨 평형을 이루었으며, 왼쪽을 낮게 오른쪽을 높게 새겨 들쭉날쭉함을 추구했으며, 검은색 화지에 새기는 구도를 따랐다. 3. 점, 가로, 세로, 곡선, 원 등 5종 서체의 요점을 제출해 고금동서 석고문의 운필 기교의 공백을 메웠다. 4. 선인들이 사용하던 모사본을 교정하고 보충하였다. 숭쉐상(宋薛尚) 연습본에서 17개, 청건룽베이징쿵묘(清乾隆北京孔廟)의 석각 모사본에서는 40개, 청나라 말기 민국초기 우창숴 모사본에서는 13개의 틀린 글자와 이자(異字)를 정정했다. 고대문서체 대사이며 중국은상(殷商)문화학회 회장이신 후허우쉬안(胡厚宣) 교수는 ‘견해가 독특하고 뜻이 새롭다’고 친찬하셨다. 치궁은 진지하게 <징순이임석고문(景舜逸临石鼓文)>을 보고 기뻐하며 ‘너 정말 석고문을 잘 썼구나! 잘 썼어, 참 잘 썼어!’라고 말했다. 그후 징순이는 중국서예연구 제4차 학술업무보고회에서 석고문에 대해 이렇게 논술하였다. ‘석고문은 대전(大篆)의 대표작으로 불리며 대전에서 소전(小篆)으로 과도하는 작품으로 글자 형태의 방형, 원형, 능형, 장형(長), 단형(短)의 구조를 갖추었다. 전통도(篆通道), 예통전(隸通篆), 해통전(楷通篆), 행통전(行通篆), 초통전(草通篆), 현대대가통전서(大家通篆书).’ ‘그 어떠한 서체를 배우든간에 근원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고대 문자학의 각도에서 공부하고 연구하여야 한다. 탕린추(汤临初)의 서지(書指)에서 이르기를 서체를 나무에 비유하면 전서는 뿌리, 8대 종류(八分)는 나무 줄기, 행서와 초서는 꽃잎에 해당된다. 만약 강에 비유한다면 전서는 수원에 해당된다.’ 아버지, 자식, 자손이 있듯이 혈통을 계승한다. 하나가 있고 둘이 있어야 셋이 있고 백대, 천대, 만대까지 이어질 것이다. 하나를 위주로 하나를 지키는 것은 하늘과 땅에 대한 도리이다. 인간은 천지의 영물로 당연히 천지의 도리를 모방하여 예도를 세워야 한다. 예도는 인간의 도이기도 하다. 도를 널리 알리려면 서예의 도를 세워야 한다.’ 징순이가 출판한 <징순이임석고문>은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석고문의 이론을 창작한 학술논문이다. 그 후에 출판된 <징순이서종정천자문(景舜逸書鐘鼎千字文)>은 중국에서 첫 번째로 되는 종정문임첩 모사본이며 <징순이서석고문천자문(景舜逸書石鼓文千字文)>은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석고문 글자체로 새긴 천자문 비첩이다. 징순이가 주필한 <치궁서법해석대자전>(啟功書法解析大字典)은 중국에서첫 번째로 되는 당대 유명 서예가가 편저한 대자전이다. 그는 13년간 치구의 작품 중에서 모범글자를 엄선하여 일자일예(一字一例)의 방식으로 한자 필획에 따른 통상글자체를 책으로 편집했다. 매 하나하나의 글자마다 기본적인 획수부터 필획구조에 이르기까지 같은 글자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비교분석을 진행하였다. 이는 치궁 선생님의 서법을 습자하는 활용성이 강하고 기능이 완벽한 대형 서법 공구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이 대전을 얻는다는 것은 치궁 선생님을 집에 초빙하여 얼굴을 맞대고 일필일획을 전수 받는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국민학교 란저칭(藍澤清)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전 저의 선생님을 모셔 왔어요. 즉 징순이 선생님이 주필하신 <치궁서법해석대자전>이지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저는 이 대자전이 징순이 선생님이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대작임을 알았어요. 그리고 징순이 선생님이 치궁 할아버지에 대한 공경, 치궁 할아버지의 서예 성과에 대한 존중 및 이해와 터득을 알게 되였어요. 그 외에도 진순이 선생님은 저에게 서예를 가르치는 동시에 인간의 도리를 더더욱 중시하며 이것이 다 치궁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언행에 옮긴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국민학교 둥란(董冉) 학생은 ‘지금 우리가 치궁 할아버지의 필적을 직접모사할 수 있어서 많은 시간을 절약했으며 성장과정에서 더 많은 지식을 배웠어요. 아마 우리는 이 보귀한 재부에 선배들이 빼앗긴 시간과 흘린 땀이 얼마큼 될 지 잘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치궁 할아버지께 감사해 하고 선배들이 남겨주신 지식과 경험을 아껴야 해요’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 징순이 선생님은 한편으로 수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를 계속해 그 소감을 속속 책에 옮기고 있다. 이미 출판된 전문서적들로는 <서예와 예의>, <서예와 지력>, <서예와 성격>, <서예와 철학>, <서예와 한자>, <서예와 문학>, <서예와 기하>, <서예와 국화(國畫)>, <서예와 무도(舞蹈)>, <서예와 군사>, <서예와 인생>, <서예와 인재>, <서예와 시대>, <서예와 과학>, <서예와 장수>, <서예와 소질교육> 등이 있으며 서예를 배우는 자들에게 계발성이 크다. 현재 진순이 선생님이 편저하신 서예 교과서로는 <서법>과 현재 집필 중에 있는 <경운현서보(景雲軒書譜)•중국의 역대 서예 국학 시리드 교재>가 있으며 곧 출판되어 교육사업에 투입 예정이다. <서법>이란 교재는 베이징징산학교(北京景山學校)의 특별 초청으로 집필한 것이다. 이 교재는 중국의 역대 서법의 전형적인 비첩을 주선으로, 서법의 예의로 한자를 풀이하였고 이 키로 넓고 심오한 서예공부의 문을 열어주었으며 서법에 담긴 국학의 진리를 일깨워 주었다. 또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서법, 예의, 국학의 입장에서 한자를 해설하고 서법을 기재한 교재이다. 그는 ‘서예교육은 예의를 가르치는 것이다. 현대 가정의 물질적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문화지식도 점점 풍부해지고 있지만 부모들의 외동자식에 대한 각별한 사랑 및 직장생활에서 오는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자녀에 대한 예절교육을 소홀히 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예의를 배우지 않고서는 뜻을 세울수 없다, 서예공부를 통해 미적 감각을 향상시키고 더 나아가 예절수준을 높여야 한다.’주장하였다. <경운현서보>(景雲軒書譜)는 100권에 달하는 대작으로, 교육부의 <루장(儒藏)>공정 수석전문가 겸 베이징대학 수석교수이신 탕이제(湯一介)가 '선왕 이르기를 예의를 지키고 화해를 귀하게 여기는 자는 아름답다’라는 글을 써서 격려해 주었다. 중국대중문학회 회장 겸 유명한 서예가이신 자오신(趙鐵信)은 ‘고금동서의 비첩에 적혀진 명언들의 총집이고 서법예절을 국학교육에 도입하는 시초를 열었다’고 격려하였다. 징순이는 고대 문자체를 연구해 취득한 성과를 성공적으로 실천했으며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운율을 갖추었다. 그의 서예작품은 수차에 걸쳐 각종 상장을 수여 받았으며 그중 <중일서예교류전>, <중국 서화가 예술명품전>과 <제5회 국제미술작품전>에서 금상을 수여 받았다. 또 일본, 한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언어로 외국의 간행물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국내외에 이름을 날렸다. 일부 작품들은 국내외 문화관과 박물관, 기업, 유명인사들이 수장하고 있다. 고대 문자체 대사 후허우쉬안은 징순이 갑골문 서법에 대해 ‘작품은 필획이 가늘면서 단단하고 늘씬하며, 서체가 정연하면서 무게가 있고 호탕한 가운데 단정하다. 갑골문의 기세 드높고 순수하면서도 소박하며 웅장하고 통쾌한 서예 스타일을 표현했다’고 평가하시면서 ‘예술의 진품’이라고 적었다. 중국서예협회 연구부 주임 겸 유명한 서법 이론가이신 왕징펀(王景芬)은 ‘징순이는 석고문의 전통서법을 이어 받았을 뿐더러 진나라 전서체의 웅장하고 강력한 기운을 흡수하였다. 그의 작품은 짜임새가 탄탄하고 글자체가 살짝 길다란 편이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변화를 보여 주었다. 글자체에 따른 취미를 조성하고 성김과 빽빽함이 운치있고 허실이 상호 보조했으며 광활하면서 기세 있고 필세가 강하며 종이를 뚫을 기세다. 방형체와 원형체를 병행하여 사용했고 선라인은 균형이 잘 잡혀 우아하며 곡선과 호선은 유창하게 대칭을 이루었고 가로선과 세로선은 듬직하면서도 파워있는 필체를 사용해 양단에서 필을 마무리하였다. 중간이 굵고 양측이 다소 가늘며 스타일이 둔중하면서도 소박하며 또 거기에 강경한 기세까지 부여해 고전적 우아함에 시대적 숨결을 새겨 넣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중국서법문화연구소 소장 겸 수도사범대학 교수이신 어우양중스(歐陽中石)는 징순이가 당대 명인들의 석고문, 종정문 스타일로 편액에 새긴 글자를 보고 ‘잘 썼네, 잘 썼어. 이만큼 수준 높은 사람은 별로 없어요’라고 되풀이하였다. <불교문화>의 편집장인 링하이청(凌海诚)은 ‘오늘날 고대문의 일인자로징순이가 손꼽힌다’라고 찬사하는 글을 남기셨다.   국학대사까지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 -제자들만 천여명 이상- 지난 수십년간 서화가 징순이(景舜逸)는 서예를 열공하고 정통하여 각종 사회행사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자신이 배운 것과 얻은 전부를 사회에 반납했다. 이를테면 그는 베이징 타오란팅공원(陶然亭)에 새로 비치한 거석에 ‘潭影流金’란 글자를 새겼다. 한국에서 개최된 세계 대학총장 문화예술 포럼의 개막식을 위해 ‘영웅호걸들이 한데 모여 규범을 만들어 간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제16회 화뤄겅(華羅庚) 골드컵 소년수학 초청대회 결승전을 위해 글자를 새겨 주었고 광둥성 후이저우(惠州) 화뤄겅중학교에 기증한 책에 ‘천하를 통달하려는 포부를 지녀야 천하의 임무를 완성하느니라’라는 격려의 한 마디를 적었다. 문화부가 출판하는 <중국문화지식>이란 도서의 제목을 썼다. <중소학생 혁신>이란 잡지 명칭을 썼다. YandaGroup(燕達集團)이 발행하는 <옌다신문(燕達報)>의 간행물 명칭을 썼다. 베이징시 제41중학교의 다섯번째 건물 명칭 ‘근박루(勤朴樓)’를 썼다. 베이징시 시청구(西城區) 위중소학교(裕中小學) 제6회 예술제를 위해 ‘어릴적 부터 시작된 참된 교육은 아름다움을 발산하리다’란 글자를 썼다. 중일한경제발전협회의 연차회의에서 3개국이 공통 사용하고 있는 한자 ‘米’, ‘水’, ‘魚’를 썼다.  ‘중국문화서원(中國文化書院) 불상문화연구원(佛商文化研究院)’이란 문패를 새겼다. …… 중국 정치협상회의 60주년을 경축하는 ‘징청서예대회(京承筆會)’, 7차에걸친 ‘서예반 사랑나누기 수상식 친목회’, ‘서예와 인생 백가강좌(百家講座)’, ‘중국 서예 창작 세미나’, ‘과학기술과 예술의 시대를 맞이하여 시리즈 강좌’ 10차 그리고 장징성(臧京生), 리멍야오(李孟堯), 가오팡(高放) 등 유명한 연기 아티스트들의 강좌 및 ‘100명의 학생 및 학부모와 함께 하는 베이징사범대학 치궁(啟功) 추모회’를 소집했다. …… 중국문화서원, 삼지도상국학원(三智道商國學院)의 각종 수강반 오픈행사에 초청되어 폐백을 올렸다. ‘징순이 석고문 서예대전’은 중국사회과학원 은상사(殷商史)연구센터 등이, ‘징순이 석고문 서예 순환전시’는 허베이성 런츄시(任丘市) 정부, ‘징순이 석고문 서예 순환전시 친황다오전시’는 친황다오시위원회 노간부국이 주관한 것이다. 징순이는 베이징외국어대학의 초빙교수이며 베이징사범대학, 중화여자학원, 베이징건축공정학원 및 전국정치협상회의,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중국한의연구원 등 고등학부와 기관에서도 강좌를 하고 계신다. 서예를 보급하기 위해 심지어 노년대학 및 정부기관의 직원들을 조직해 서예 수강반을 개강하기도 했다. 그는 서예와 예의 교육을 병행해야 하며 어릴적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청소년들의 교육에 정력을 몰붓고 있다. 또 3살이면 글, 6살이면 붓 글씨를 배울 수 있고 8살에는 區급 행사의 조직과 교류, 12살에는 市급 대회, 16살에는 전국전에 참가할 수 있으며 28살이 되면 글을 가르치고 사람을 교육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서예를 배우고 익히는 것은 수양을 쌓는 과정으로 법과 이치에 맞아야 할 뿐더러 예의까지 갖추어야 서예의 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수양이란 옛날부터 전해내려운 비첩, 이론, 문학, 역사, 철학 등을 말하는데 이를 수직적 및 수평적으로 분석하고 동서남북의 명승고적들을 유람하고 나면 서예가 크게 진보된다는 뜻이다. 아울러 청소년들에게 서법을 가르치는 과정에 ‘서예를 배우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시종일관으로 적용했다. 그는 서예(한자)를 개인의 장기로 배울 수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첩의 서법을 익히는 동안 꾸준한 연습과 관련된 지식을 축적함으로써 어린이들은 관찰력, 모방력, 기억력, 상상력, 의지력, 독립성을 제고하고, 청소년들은 지식을 쌓는 동시에 고상한 윤리도덕관을 수립하는 것이라 보았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한자에서 비쳐지는 중화민족의 뿌리와 유구한 역사의 흐름 및 문화 원천을 계승한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있도록 정성껏 가르친다. 1998년에 베이징 시청구 청소년과학기술관 관장의 지원으로 서예반을 개강하게 되었는데 그중 어린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고 연장자, 중년, 젊은이들도 적잖게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교육사업을 실천하면서 ‘예술 교육은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등 관점을 제출했다. 또 ‘서법 및 기교를 사상품덕, 지력개발, 각종 지식과 융합시킨’ 교육철학 및 점진적, 교차적, 대비적인 교육방법과 취재, 견학, 경기 등 즐거운 교육방식을 채택하면 양호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서법을 배운지 7년이 넘는 고등학생 쟈오양(焦陽)은 ‘서법으로부터 터득한 예의’라는 작문에서 이렇게 썼다. ‘징순이 선생님과 서예를 배우는 과정에 강함과 부드러움이 병행하는 서법의 기세를 배웠으며 거기서 발산하는 농후한 문화적 분위기와 자고로부터 중국에서 전해내려온 유구한 예의문화를 깨닫게 되었다.’ ‘나도 처음에는 글씨본을 모사했으며, 그러다가 <조전비(曹全碑)>첩에 익숙해지고 징순이 선생님의 서법에 대한 해독을 들으면서 문자에 내포되어 있는 예의문화를 점차 알게 되었다. 서법은 나의 행세를 옳바르게 잡아주는 교과서이며 그리고 나의 영혼을 맡기는 곳이 되었다.’ 초등학생 저우양진웨(周楊浸月)는 <꿈을 이루다>라는 작문에서 이렇게 썼다. ‘징순이 선생님은 공부를 대함에 있어 매우 엄격하지만 학생들을 너무나 사랑해 주시는 분이다. 2003년에 있었던 일인데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 사스 때문에 다들 수업하러 올 수 없게 되자 선생님께서는 허리를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전화로 가르쳤으며 그 후에는 아예 집에 초대해 배워 주셨다. 그는 침대에 누워 아픔을 참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지도를 해주고 숙제를 검사해 주었다. 그러나 사스가 지나기 바쁘게 또 교단에 올라서 허리를 붙잡고 수업하고 숙제 검사했지만 단 한 번이라도 수업을 놓친 적은 없다. 이러한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으로 하는 교육을 알게 되었으며 징순이 선생님만의 명강의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국민학교 학생 탕정(唐政)이 쓴 작문 <서법 공부에서 느낀 체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처음으로 서법을 배울 때 징순이 선생님은 과찬해 주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록 진보가 없어 고민을 많이 했다. 정말로 ‘혼자 옥상에 올라가니 세상 끝이 다 보인다’는 기분이었다. 이를 눈치챈 선생님은 고대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에서 당대 치궁 국학대사에 이르기까지 열공한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나를 일깨워 주었다. 그때서야 붓은 부드러우나 강인한 의지가 받쳐 줘야 하며 연못이 먹으로 그득 채울 정도의 진취심과 꾸준함만이 ‘마음과 손이 통하는’ 재주를 연마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열공의 뒤에는 고생이 따르지만 그 결과는 지불한 대가와 비교도 안되는 큰 성과를 가져온다’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 ’ 베이징시 시청구 사범학원 부속중학교 리리샤(李麗霞) 교사는 징순이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에서 ‘중년이 다 되어 서법을 배우자니 고생이 많습니다. 하지만 진보가 느려도 조급해 하지 말아 주세요. 어떠한 곤난이 있어도 끝까지 배워 보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것이 정말 좋습니다. 목소리도 좋지만 선생님이 쓰신 글을 더더욱 좋아합니다. 저는 서예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나면 분발하게 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베이징교통대학 소질교육센터 장훙(張紅) 지도교사가 쓴 <내가 걸어온 인생>이란 문장에는 이런 구절이 보인다. ‘징순이 선생님의 과학적이고 엄격하며 체계화된 지도를 받고 나니 미망에서 깨어난듯 진보가 혁혁하다. 징순이 선생님은 가장 기초적인 이론을 배우고 가장 기본적인 필획 연습을 할 것을 요구하며, 선인들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든 분이시다. 수평적 비교를 하는 가운데 차별점을 찾고 부족점을 발견하고 수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목표를 찾고 필사적으로 분발하며 자신에게 만족하는 정서를 극복하고 한걸음씩 꿈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저 해변가를 향해 걸어가도록 가르쳤다.’ 최근에 징순이 선생님이 가르치신 학원 제자들만 천여명으로, 이들은 전국 및 베이징 서예회화대회에서 참석해 여러차에 걸쳐 별의별 상장을 수여 받았다. 그중 교육부 예술위원회가 주관한 전국중소학교회화서예대회 수상자 가운데 96%가 징순이 선생님의 제자들로, 교육부 예술위원회는 징순이 선생님께 지도작업 일등상을 수여하였다. 2004년에 문화부 대외예술전시센터 등의 주관으로 개최된 ‘2008년을 향한 제3회 국제아동예술대회’ 수상식에서 36개국의 선수들이 선출한 ‘10대 최우수 서예가’ 중 4명은 진순이 선생님의 제자였다. 이는 그 어떤 시합에서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이에 매체들도 징순이 선생님의 혁혁한 교육성과를 너나없이 보도하였다. 미국, 일본, 한국과 홍콩, 마카오, 타이완 지역의 교육계도 이 소식을 듣고 여차 관련인사들을 파견하여 답사를 진행했으며 한자 서예 교육의 경험을 교류하였다. 2004년 8월 <징순이 교수성과 및 사생작품전>이 중국공청탄 중앙집행위원회 <희말 월간지> 잡지사, 중국사회과학원 은상사연구센터, 베이징외국어대학 서화협회 등의 주최로 베이징시 노동인민문화궁에서 개최되었다. 중국서예협회에서 부주석을 맡고 있는 장뱌오(張飆)가 필을 들어 전시회 명칭을 썼다. 전시품들은 서당교재로 <제자규(弟子規)>, <여아경(女兒經)>, <신동시(神童詩)>, <효경(孝經)>, <삼자경(三字經)>, <백가성(百家姓)>, <천자문(千字文)>, <논어(論語)> 등이 있었다. 이러한 교재는 간단명료하여 알아 보기 쉽고 생동적이며 캐릭터가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또한 간결한 시범을 통해 학생들이 반복적으로 연습할 수 있으며, 어린이들의 지혜를 계발하고 윤리도덕을 가르치거나 예의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완벽한 인격을 형상화하도록 무의식적으로 감화시키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는 청소년 인재육성에 심원한 의의가 있을 뿐더러 성인들의 조직력, 창조력을 제고함에 있어 적은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효과를 나타내며 중년과 연장자들의 사유를 활성화시키고 성정 도야와 연년익수에 매우 유익하다. 금번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 모두 갑골문(甲骨文), 종정문(鐘鼎文), 석고문(石鼓文),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등 서체를 사용했으며 사생간의 서예를 가르치고 예의를 지키는 행위세범(行為世範)과 교육방면의 거대한 성취를 집중적으로 구현하였다. 이에 신화사, <인민일보>, <광명일보>, <중국교육보>, BTV 등 10여개 매체들이 보도했다. 치궁 국학대사는 <징순이 교수성과 및 사생작품전>에 대한 회보를 듣고 매우 기뻐하셨다. 그는 작품집을 펼치면서 ‘청나라 때에는 우창숴(吳昌碩)가 석고문을 제일 잘 썼고 민국시기에 와서는 창성위(強盛餘)가 잘 썼다’고 말을 주고 받았다. 그러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현대 석고문을 잘 쓰는 서화가는 바로 너 징순이다’라고 네번이나 되풀이했다. 이외 후허우쉬안(胡厚宣), 쉬방다(徐邦達), 양런카이(楊仁凱), 세즈류(謝稚柳), 라오중이(饒宗頤), 선펑(沈鵬) 등 전문가들과 학자들까지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원들과 국가 지도자들도 격려하는 글(題詞)을 썼다. 이를테면전 국무원 부총리 구무(穀牧): 중화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발양하다 전 국무원 부총리 저우쟈화(鄒家華): 서예 공부에 예의를 융합시켜 인재를 육성하다 전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펑충(彭冲): 예술의 경지에는 끝이 없다 전 전인대 부위원장 부허(佈赫): 서예를 배우면서 품행을 가꾼다 전 전국정협 부주석 완궈취안(萬國全):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고대 서예문화를 발전시킨다 국무원 류옌둥(劉延東) 위원: 중화 민족 문화의 보배이다 이로써 취재는 끝났지만 징순이 선생님께서 서법으로 사랑을 전달하는 발자취는 멈출줄 모른다. 마지막으로 평생의 사랑으로 뿌듯한 제자들을 양성해 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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